Daring or Delusional 전시비평


Year: 2023
Type: Architectural Critic


건축학의 오픈소스화와 연결망

90년대생들의 담론을 소개하기 위해 이렇게 전시의 장이 마련된 것이 무척이나 반갑다. 이에 기쁜 마음으로, 나 역시 같은 90년대생으로서 대담하고 망상적인 비평과 제안으로 답하고자 한다. 사실 학부 시절동안 내가 해왔던 것은 망상적인 프로젝트들뿐이다. 그것을 실현하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 남은 시기였기에, 언젠가 빛을 보지 않을까라는 기대감과 동시에 자기의심, 불안감과 함께 밤을 지새운 기억들이 난다. 그러나 현재의 나는 당시의 생각들이 더 발전되기는커녕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의미와 유효성을 잃고, 폐기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을 느낀다. 폐쇄적인 태도로 자신의 프로젝트들과 사고의 과정을 꽁꽁 숨겼다가 훗날 기회에 왔을 때 펼쳐놓기엔, 세상이 바라는 가치는 대단히 빠르게 변화한다. 자신의 생각을 제때 알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무엇으로 남을 수 있을까? 아무도 관심가져주지 않는 나만의 소중한 포트폴리오? 담론이 담론으로서 의미를 갖기 위해서는 적절한 시기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다. 갓 학교를 졸업한 이들이 실제 건물을 통해 건축적 담론을 알리기에는 너무나도 늦다.  

건강한 비판을 통해 성장할 수 있다고 가르침을 주던 ‘건축학’이라는 학문은 신기하게도 창의성, 혹은 유일성이라는 명목하에 다소 폐쇄적인 경향을 보여왔다. 전통적 건축가들이 나만의 길, 나만의 주장, 나만의 철학을 설파하는 사이에, 건축가들이 점점 사회에서 비중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는 위기감이 든다. 정신없이 변화하는 사회 속에서 고고한 건축가의 일반적인 태도 중 하나는 변화하지 않는 보편적 가치를 찾고 이를 추구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물론 그 또한 굉장히 의미가 있을 테지만 그러한 건축가들이 사회에 변화를 촉발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어쩌면 다른 분야를 따라가며 그들의 의견을 반영하기에도 바쁜 것이, 건축이라는 낡고 과대망상적인 학문의 태생적 한계일지도 모른다.    

갑작스럽겠지만 혹시 OpenAI의 DALLE2, Midjourney 등의 Text to Image 인공지능 모델을 접해본 적 있는가? 이 사례들에서 알 수 있듯, 이것들은 2D 이미지 영역에서 인간의 창의성을 넘나들기 시작했다. 이제는 누구나 간단한 프롬프트를 입력함으로써 창의적인 작품들을 쏟아낼 수 있다. 그리고 순진한 나는 기술의 발전이 결국 3D 공간의 생성과, 내러티브를 작성하고 가치를 부여하는 건축가의 고유의 영역까지 넘볼 수 있겠다는 섣부른 예상을 하고 있다. 혹자는 이 망상적인 예측을 반박하기 위해 ‘그 지능덩어리들은 창의성도 의식도 없으며, 우리에게는 건축가만이 할 수 있는 고유한 능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등, 이런 저런 이유로 반발감을 드러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자리에서 인공지능의 막강함을 설파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다른 학문의 영역에서 어떻게 이러한 발전이 일어날 수 있었는지를 묻고 싶다. 나는 이 모든 것들이 바로 ‘오픈소스’를 기반으로 한 체계적인 데이터의 축적, 공유, 그리고 학습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포킹(forking)이라는 단어를 들어본 적 있는가? 포킹 혹은 가지치기는 오픈소스 문화에서 코드나 기술이 여러 개의 버전으로 분기되는 과정, 혹은 그를 위한 기능을 일컫는 말이다. 만약 여러분들이 던지는 문제의식이 진정으로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든다면, 자신의 프로젝트와 담론의 포킹을 허할 수 있는가? 타인이 여러분의 생각들을 포킹하고 이어받아 새로운 담론으로 더 발전시키고 대안을 만들도록 허할 수 있는가? 나는 건축을 둘러싼 동시대적 의제들이 개인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공동의 문제라는 인식을 갖기에, 이 질문이 더욱 유효하고 의미가 있다고 본다. 물론 나의 주장대로 행동할 경우, 졸업전이라는 경주에서는 좋은 평가를 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Copy Paste: The Badass Architectural Copy Guide》에서 Winy Maas는 “독창성은 다름 아닌 낭비다!”라는 도발적인 주장을 한다.[1] 여기서 독창성은 담론과 내러티브보다 주로 형태를 말하는 것이긴 하지만, 이처럼 건축학의 복제와 변형을 금기시하는 문화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서로 참조하고 인용하는 오픈소스 문화를 만들 수는 없을까? 이를 위해서는  ‘좋아요’, ‘공유’ 이상으로 상대방의 사고를 치하할 수 있는 체계적인 방법이 필요할 것이다. 물론 나는 표절을 옹호하거나 독창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프로젝트와 담론을 발전시키는 것의 무용함을 주장하려는 것은 아니다. 또한 레퍼런스가 건축가의 무의식적 사고를 지배할 수 있음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고대인’의 ‘단단한 자의식’과 ‘장인정신’으로 무장한 건축설계자는 지나치게 비효율적이고 소모적인 과정을 당연시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교육기관을 통해 충분히 검증된 내용들을 습득했지만, 충분히 검증되지 않은 새롭고 창의적인 생각들을 위해서 선배 건축가들이 했던 고민들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 주장에 동의하든 반박하든, 여기까지 나의 글을 읽어버린 여러분들은 이 검증되지 않은 주장에 대해서 생각해 보게 되었고 빈약한 주장의 약점을 찾기 시작했다. 지금만큼은 여러분들은 내 뇌의 전기적 신호에 연결되고, 접속해버렸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무수한 접속을, 특히 젊은 세대 건축가들의 사고에 접속을 매개하는 건축 콜렉티브 In-depth의 행보를 기대해본다. 나 역시 선후배, 동료들의 사고와 그들과의 토론을 통해 성장하고 시야가 넓어짐을 느낀다. 개인주의적, 작가주의적, 영웅적 건축가가 홀로 사회의 무언가를 해결할 수 있는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어쩌면 우리는 최종적으로 과거 토속 건축이 지어지던 시대와 같이 건축가 없는 건축의 시대로 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영웅이 사라진 세상에서 남아있는 것은 다른 학문의 영역에서 발견할 수 있듯, 컬렉티브, 혹은 집단지성이다. 

전시가 시작되면 7명의 작가와 7명의 비평가, 웹사이트를 통해 접속하는 익명의 관객들로부터 새로운 연결망이 형성될 것이다. 나는 온라인으로 기획된 이번 전시에서 평문을 빙자한 나의 주장이 시의적절하다고 생각한다. 이 전시는 코로나로 인하여, 졸업을 하기 위해 떠밀려 기획되었다기보다는 자발적으로 기획된 것이며, 온라인에서 여러분들의 생각을 연결시키는 것이다. 여러분들의 목소리는 데이터화되어 기록되고 공개될 것이다. 이 데이터들이 그저 네트워크의 잡음이 될지, 혹은 신호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인용하고 포킹하게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마지막으로 여러분들의 대담하고 망상적인 담론이 보다 직접적인 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도전을 환영한다. 최소한 우리는 건축이 바꿔나갈 수 있는 영역이 어디까지인지 대략적인 윤곽과 한계를 그려볼 수 있을 것이다. 훗날, 누군가 우리의 못다한 도전을 재빠르게 이어받아 그 목표를 성취하기를 바란다.

참고문헌:
[1] Winny Maas and Felix Madrazo, Copy Paste: The Badass Architectural Copy Guide, Rotterdam, nai010 publishers 2017, 97.




개별프로젝트 비평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많으나, 본 비평문에서는 그중 세 개의 프로젝트에 대하여 정리되지 않은 평문과 질문을 남기고자 한다.

- 강해성, Climate Nomad

이 프로젝트로부터 떠오른 가장 큰 의문점은 이 시도가 근본적인 기후변화 해결책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실효성 문제였다. 물론 전시된 각종 리서치 결과를 통하여 작가가 설파하고자 한 기후변화 관련 위기의식을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열은 어디로 향하는가? 에너지 보존 법칙에 따라 사라지지 않는 열은 더위를 해소해 줄 기반시설이 부족한 서울의 다른 장소로, 혹은 지구의 다른 장소로 보내지는 것이 아닌가? 도시 냉각탑은 결국 조금 더 친환경적인 에어컨인가? 거대한 주제를 다루는 만큼, 거시적 영향력을 고려해보아도 좋았을 것이다. 

《Unknown Fields: Tales from the Dark Side of the City》에서 건축비평가 리암 영(Liam Young)은 현대 도시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지구 반대편에서 행해지는 은밀한 사건에 주목한다.[2] 오늘날 ‘친환경' 슬로건을 내거는 기업들은 각종 전자기기 및 전기자동차의 전지 생산을 목표로 거대한 소금호수에 리튬 생산 공장을 가동하는 등 지구 풍경을 바꾸고 있다. 모바일 기기로 친구들과 대화를 나누는 평범한 사람들부터 반환경주의자, 심지어는 소셜 미디어를 통해 기후변화에 대해 논의하는 환경 운동가까지 모두가 전자제품 부품 생산을 위한 중국 희토류 광산에서 방사성 물질로 가득 찬 폐수를 만드는 데에 기여하고 있다. 이러한 일련의 행위는 우리의 일상생활과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으나, 여전히 의도적으로 간과되고 있다. 이 연결성을 고려했을 때, 본 프로젝트는 서울이라는 특정 장소, 그리고 학교라는 단일한 건축 유형에 국한될 필요가 없었다고 본다. 기후 유목민이 될 수 있는 불특정 대상을 위해, 냉각탑이 다양한 장소의 비특정적 건축물과 시설에도 유연하게 적용될 방법은 없었을까?  

건축은 정치, 외교, 제도, 기술을 대신하여 전지구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 전쟁이 발발할 때, 건축은 이를 종식시킬 수 있는가? 그간의 건축은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탄약창고를 짓고, 방공호를 건설하며 ‘발생할 문제’를 해결하기에 급급했다. 만약 이러한 비관적 추측이 사실이라면, 건축은 본질에 대한 해결책을 내지 못하고 그저 국지적 사후 대책으로서만 결과에 대처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건축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건축가의 자의식 과잉을 내려놓고 다시 생각해보니, 강해성의 시도가 틀렸다고 단언하기는 어려운 듯하다. 어쩌면 사건이 벌어진 이후 해결책으로서의 건축물이 더 유효한 접근일지도 모르겠다. 건축가가 ‘짓는 행위’로써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면 그 다음 단계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제도를 손보기 위해 정치계에 입성해야 할까? 아니면 ‘짓지 않는’ 건축으로 영역을 확장해야 할까?

참고문헌:
[2] “Unknown Fields: Tales from the Dark Side of the City”, Vimeo video, 1:04:58, aksioma, 2019., https://vimeo.com/323308462

- 이현정,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

필자는 2019년 졸업작품으로 <사건의 지평선>이라는 시청광장 프로젝트를 제안한 바 있다. 2022년 현재, 이현정의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는 비슷한 문제의식에서 출발해 완전히 다른 방법론에 도달하였다. 공간 이용의 자유도 측면에서 광장을 운영체제에 비유해보자면, <사건의 지평선>은 구글의 안드로이드이고,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는 애플의 iOS이다. <사건의 지평선>에서는 광장을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다양하고 자유롭지만, 불친절하며 확실하지 않다. 반면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에서는 프로그램 및 형태가 명확하게 정해져 있으며 사용 설명서 없이도 추후 광장이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 명쾌하게 읽힌다.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는 결과만큼이나 과정이 중요하다.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서로 다른 진영의 트위터 계정 간 편향적 정보 교환을 시각화한 연구가 있었는데, 이현정은 유튜브 알고리즘 실험을 통해 이를 2022년 한국 대선에 적용하였다. 이처럼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래빗홀, 필터버블을 시각화하고 검증한 시도는 위 특성이 전세계적인 문제라는 것을 지적하는 듯하다. 아쉽게도 이번 온라인 전시에는 포함되지 않았으나, 조선시대부터 현대까지 이어지는 정보의 지리 매핑, 추천 알고리즘의 원리 분석, SNS 공간구조 분석(틱톡, 유튜브, 인스타그램) 등 새로운 시각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이 프로젝트의 강한 설득력은 무솔리니와 예수가 등장하는 붉은 렌더링 이미지 및 도면보다 밀도 있게 진행된 리서치에 기인한다. 

이 프로젝트의 한계는 결여된 현실성이다. 우선 렌더링 이미지를 보자면, 역사적 평가가 끝났다고 여겨지거나 선과 악이 명쾌하게 나뉘는 듯한 인물을 내세우는 대신 현재 그 평가가 극단적으로 갈려 모호한 위치를 점하는 선동가를 포함했다면 어땠을까? 그것이야말로 무수한 래빗홀을 지닌 현 시대의 자화상이 아닌가? 다음은 확장성의 부재, 즉 레지던스에 머물 수 있는 선동가의 수가 제한적이라는 점이다. 유튜브 채널을 슬쩍 둘러보아도 알 수 있듯, 세상에 선동가의 수는 대단히 많다. 레지던스에는 누가 살 수 있는가? 레지던스는 선동가들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시스템일까? 만약 그렇다면 제한된 인원의 레지던스 입주 조건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오히려 고층화가 되었어야 했나? 만약 청와대가 용산으로 이전된 현재에도 광화문 광장 ‘의사결정권자의 축’에 선동가의 의견이 투영될 수 있다면, 그들은 지속해서 이곳에 모이게 될까? 여기가 여전히 정치적으로 중요한 장소라면, 강력한 힘을 지닌 집단이 들어가게 될까? 목소리를 지닌 누군가 정의의 칼날로 그들이 생각하는 다양성을 재단한다면 이를 기준으로 삼아야 할까? 입주 기준을 자의적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는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에는 거대한 진입장벽이 형성된 것으로 보인다. 일반 시민들은 광장에서 벌어지는 자극적 사건에만 주목하겠지만, 실제로는 정치적 공간 특성상 가시적으로 보이는 건축물 바깥에서도 다양한 물밑 상황이 펼쳐진다. 

정리되지 않은 질문을 연달아 던졌으나 이를 오히려 긍정적인 의미로 해석하기를 바란다. 프로젝트의 현실성과 관계 없이, 대담한 도전 덕택에 광장에 대한 편견을 깨뜨리는 또 하나의 새로운 카드가 생겨났다. 어차피 지어지지 못할 졸업 설계라면 차라리 제대로 도전하여 제대로 실패하는 것이 좋다. 확실한 점은 <광화문 선동가 레지던스>가 제대로 선동-도전하였고 논의를 촉발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선동 당한 이들을 위해 후속으로 펼칠 이현정의 선전문이 궁금하다. 언젠가 이 프로젝트가 선동 당한 자들에 의해 포킹(forking)되어 새로운 유형의 광장이 탄생하기를 기대해본다. 

- 장유진 + 이지수, Unfollow

건축가 조민석이 2019년 서울 시네마테크 공모전 발표에서 언급했듯, 뉴욕 타임스퀘어의 스크린을 서울 도심에 복제하려는 시도는 스마트폰이라는 더 나은 대안의 등장으로 인해 무용지물해졌다. 기술은 자기 스스로를 끊임없이 대체하며, 건축에 비해 더 유연하고 빠르게 기능한다. 변화가 느린 건축의 태생적 한계를 고려하면, 인스타그램을 대체하는 지배적 소셜 미디어가 등장했을 때 이 프로젝트는 그 목적성을 잃게 될 가능성이 농후하다. 그러나 인스타그램이 멸종한 시대에도 이 건축물은 건재할 것으로 보인다.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는 각종 미디어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모두가 사라진 곳에 남아있는 것이 도시의 건축물이라는 점이다. 그 지점이 바로 건축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특수한 영향력이다. 인스타그램이 주제가 아니었어도 이 프로젝트는 성립될 수 있을 것이다. 오히려 인스타그램이 없는 시대에 홀로 남겨진 이 콘크리트 덩어리를 어떻게 활용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구체적인 프로젝트 내용으로 들어가자면, 복잡하고 긴 보행가교에 의해 단편적 이미지로 공간 전체를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그러나 작가들의 의도와 관계 없이 본 프로젝트는 훌륭한 조형을 지닌 인스타그래머블(Instagrammable) 공간이 된 것으로 보인다. 같은 공간이더라도 다른 각도로 찍을 경우 새로운 이미지가 형성된다. 만약 시각 정보에 집중하는 인스타그램에 대항할 목적이었다면, 사진 촬영이 불가능할 정도의 조도를 구현해보는 것은 어땠을까? 암흑 속에서 사람들은 비시각적인 감각에 더 주목했을지도 모른다. 다시 건축가 조민석을 언급해보겠다. 그는 마곡 스페이스 K를 설계한 뒤 “집이나 직장은 오래 머무르는 곳이라면 공원과 미술관은 누구나 오가는, 끊임없이 움직이는 공간이에요. 사진 한 장으로 설명되는 ‘인스타 성지’보다는 사람들의 오감을 자극하는 공간으로 만들고자 했습니다.”라고 설명한다.[3] 이미 인스타 성지가 된 마곡 스페이스 K와 비슷한 언어와 전략을 극단적으로 채택한 <Unfollow>의 팔로우 수는 증가하고 있는 듯하다. 이러한 전략이 성공적으로 적용될 수 있다고 전제해보자. 그러나 전시 기획의 측면에서는 더 많은 설득이 필요하다. 이 프로젝트의 의의가 이미지화된 공간에서의 경험과 공간을 직접 체험하는 것 간의 차이를 극대화하는 것에 있다면, 모형의 작은 크기로 인하여 그 차별성을 감지하기엔 한계가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프로젝트가 이미지 중심의 공간 해석을 비판한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미지와 영상으로 설득을 하기에는 자기 모순에 빠질 우려가 있다.

건축은 새로운 기술에 대항할 수 있는가? 필자는 그 가능성에 대해 다소 비관적 태도를 취한다. 작가의 대담한 시도는 불가능성을 다시금 강조하는 듯하다. 한편, 기술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갖는 대다수가 러다이트 운동(Luddite)과 같이 전복을 시도하거나 비꼬는 것으로 한정된다는 점은 아쉽다. 기술의 주류가 가는 방향성이 옳지 않다고 느껴진다면, 기술을 역으로 활용하여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을까? 잊히고 소외된 장소를 인스타그램으로 재조명하는 시도는 불가능했을까? 포스팅을 통해 새로운 연결망을 구성할 수는 없을까? 기차와 같은 교통수단이 개발된 산업화 시대 이전, 기존의 운송 수단은 마차였다. ”내 마차를 위해서 노동하는 말을 잘 이해하는 사람은 저밖에 없어요. 말과 저는 교감을 통해 이동한답니다. 기차라 불리는 저 감정 없는 깡통에게 제 몸을 맡길 수 없어요!”라는 주장은 의미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 이후의 일은 모두가 알고 있다.

행위자-네트워크 이론(Actor-Network-Theory)에 따르면 인간과 비인간은 동일한 자율성을 가지며 서로 영향을 미치고, 동일한 네트워크에서 관계를 형성한다.[4] 기술은 아무런 맥락 없는 공허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인간과 연결되어 관계망을 형성한다. 그렇다면, 기술이 올바른 길로 나아갈 수 있도록 사회와의 관계를 구성하는 것은 어떨까? 우리는 점검하고 유지하고 개선하는 메인테이너(maintainer)가 될 수 없을까? 오늘날 우리에게 필요한 부분, 혹은 요구되는 부분은 “사람이 아닌 것들과 함께 사는 방법”이며, “삶을 지켜내는 기술”을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것이다. [5], [6]
 

참고문헌:
[3] 강지원, “네모 평평한 마곡지구에 4개의 언덕과 3개의 호(弧)가 생겼다”, 한국일보, 2020.09.21, https://www.hankookilbo.com/News/Read/A2020091809210005563
[4] Latour, B., 2005. Reassembling the Social: An Introduction to Actor-Network-Theory.
[5] 도서 『로봇의 자리』(전치형, 이음, 2021)의 부제목을 인용하였다.
[6] 도서 『사람의 자리』(전치형, 이음, 2021)의 부제목을 인용하였다.






JIYONG JEON

Algorithm | Existence | Speculative Design | Event | Computational Design | Free | Critical Thinking | Exogamy | Technophile | Body Hacking | Illusion of Knowledge | Skepticism | Heterotopia | Sublime | Materiality | Atmosphere | Post-humanism | Technology | Futurism | AI | World-view | Cinematic Architecture | Mutant | Inforg | InFORMation | Infosphere | Estrangement | Fields Theory | Game | Originality | Plagiarism | Identity | Player | Model | Data | Invention | Virtuality | Cyber | Value | Program | Robotics | Tragic Beauty | Affordance | Information Modeling | Fiction | Aronism /  
PROJECT
ABOUT
NEWS
INSTAGRAM
UPDATES
[24/12/20] 제19회 베니스건축비엔날레 참여작가
[25/03/28] 제4회 서울도시건축비엔날레 참여작가


© 2025 Jiyong Jeon. All rights reserved.